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조선 첫 해외의료선교사 김윤식

  • 1918년 11월 19일, 김윤식 선교사는 첫 해외 의료선교사로 중국 땅을 밟았다. 김윤식 선교사의 4남 김영정 장로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 김윤식은 평양 장정현교회 출신으로 숭실학교 졸업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다닐 때 세브란스병원 안에 있던 남문밖교회를 다니셨고,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교회에서 지휘를 하셨고 유학을 꿈꾸셨다.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김윤식은 유학을 내려놓고 한국교회 첫 번째 해외 의료선교사로 파송받아 사역하였는데,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과 삶을 통해 엄청난 일을 중국 땅에서 행하셨다.
  • 1937년 8월 경 청도 한인교회 성도들
    (중앙의원 앞에 위치한 일본인교회를 빌려 오후에 주일예배를 드림)
  • “래양 김윤식 의사의 병원은 일장월취하여 특별한 신용과 칭찬을 받는 중 일반 교파, 교육계, 상업계는 물론이요 당지 관청에까지 촉탁을 받아 일반 관리, 죄수의 치료와 위생을 담임케 됨으로 우리의 숙제이던 감옥전도 사업실시가 된 일이오며”
  • (1923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2회 회록 90쪽)
  • 그가 중국 땅을 밟은 지 5년 채 되지 않아 거둔 선교의 결실은 하나님의 은혜이고,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데, 이와 같은 결실은 선교지에서 자신의 자녀를 먼저 하나님 나라에 보낸 눈물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.
  • “거4월분에 김윤식 의사의 아들 4세 된 것이 별세하였사오며”
  • (1921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10회 회록 中)
  • “홍목사의 다섯째 아들과 김윤식 의사의 둘째 아들이 각각 본국에서 금년 별세하였사오며”
  • (1923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2회 회록 中)
  • 특히 김윤식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를 향한 큰 사랑의 섬김 “친절한 치료”를 하였고, 특히 부인 박희복 선교사는 선교사의 자녀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였다.
  • “작년 10월부터 금년 1월까지 4개월 동안 방효원 목사(故 방지일 목사 부친)는 질병으로 고생하고 그 부인과 아이는 독감으로 1개월 동안 신고하였고 또 두 아이는 홍역으로 40일간 고생하였고 그 부인은 유통으로 수삭 동안 신고하는 중 세 번이나 몽혼하고 아홉곳이나 수술하였는데 4개월 동안 경야하여 고생을 많이하고 용비도 200원이 소모되어 곤난막심하게 지내였나이다. 김윤식 의사가 수고를 많이 하였사오니 총회에서 편지하여 감사한 뜻을 표하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.”
  • (1919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8회 회록 中)
  • “선교사 방효원씨 부인과 박상순씨 부인이 병중에서 위태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김윤식 의사의 친절한 치료로 쾌복하였사오며”
  • (1920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9회 회록 中)
  • “선교사의 자녀들은 여전히 김윤식 의사의 부인이 학교 모양으로 교수함으로 성적이 량호하오며”
  • (1920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9회 회록 中)
  • 1935년 박상순 목사 귀국기념사진
  • 처음에는 중국인들에게 아편장사로 오인받기까지 했고 하루에 환자도 3~4명 수준이었으나 3년이 되어서는 5~60명에 이르는 등 결국 그의 섬김은 중국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.
  • “래양읍 촌간유지한 형제 수십명이 발기하여 현판 2개를 김윤식 의사에게 선사하였은데 가지고 올 때에 8인이 메고 음악을 갖추어 수십명 발기자는 뒤에서 따라오고 구경군 수백명은 행렬을 지어 따라와씅니 이것이 갑으로 말하면 수삼십원이나 유공한 인물에 하는 대우로 하였으니 참 감사하오며”
  • (1921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10회 회록 中)
  • 1930년 초, 래양에서 청도로 이주하였고, 중앙의원을 개원하여 의료선교를 계속하셨다.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고, 그래서 그 지역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.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0년 쯤 광복군 군자금에 관계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 체포되었고, 영구출국당하여 고향(평남 평원군 숙천면 독수리)으로 돌아와서는 자택에 연금되어 더 이상 의료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. 이후 1.4후퇴 때 서울로 오셨고, 부산 적기(현. 범일동) 피난민 수용소 내 천막에서 생활하셨다. 그리고 1958년 8월 7일, 위암으로 투병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.
  • 별세하기 전까지의 7여 년의 행적은 장례 때의 기억들 속에서 충분히 짐작된다.
    “1958년 8월 7일, 부산 적기에서 별세하셨는데 적기교회 한목사님의 인도로 장례예배를 드렸다. 그런데 장례예배 때 사랑을 많이 받은 숭실학교 중고등학생들이 참석하여 성가를 불렀고, 숭실학교 교사들과 학생들, 특히 흑석동 성모병원 원장으로 섬기셨기에 수녀들과 병원에 관련된 외국인들이 많이 참석하여 장지까지 동행하며 추모하였다.”
  • (후손들이 전해 준 장례 때의 기억 중에서)
  • “주의 제단에 산제사 드린 후에 주 네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복락을 누리겠네”
  • 김윤식 선교사는 평소 좋아하신 찬송 “주의 주실 화평”대로 선교지에서 의사 선교사로서, 고국에서는 의사 장로로서 “주의 주실 화평”을 이루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셨다.
  • 김윤식 선교사 장례식